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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제근 교수 정년 인터뷰

지제근 교수 정년 인터뷰

  • 송성철 기자 songster@kma.org
  • 승인 2003.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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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학들로부터 '선천성 병리인'(bone pathologist)으로 불릴 만큼 병리학자로서 외길 인생을 걸어온 서울의대 지제근 교수가 지난 2월 말 40년 간 정들었던 병리학교실을 떠났다.
"학문적 욕심에 쫓겨 하루하루를 지내다 이제야 내 시간을 찾았다는 해방감을 느낍니다."

선천적인 병리의사이자 후학들에게 학자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 교수는 인터뷰 시간 내내 예의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40년 의사 인생을 회고했다.

지 교수는 "현대의학을 모방하던 이륙기에 들어왔다가 국제 경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고도 성장기에 떠나게 됐다"며 "의학 발전의 밑바탕이 된 데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정년퇴임을 맞는 소감을 밝혔다.
"병리학에 대한 남다른 외경과 자긍심을 한 순간도 저버린 적도, 후회한 적도 없습니다."

지 교수가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4학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궤양으로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위궤양과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품은 지 교수는 질병과 죽음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간직한 채 의사가 돼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품게 됐다. 의대에 진학한 후 고 이성수 교수와의 운명적 만남은 지 교수를 평생 병리학자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 이성수 교수님의 생에 대한, 학문에 대한 진실한 태도를 존경했고, 졸업 후 망설임 없이 병리학교실에 들어갈 것을 결정했습니다."
지 교수는 미국에서 6년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모교로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던 1976년 당시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대학에서 보내주는 1~2년 기간으로는 4년 정도 걸리는 미국의 병리전문의 과정을 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사직서를 내고 이민비자를 받아 미국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당시 상당수 졸업생들이 이민비자로 미국에 건너갔지만 대부분 미국에 정착했고, 모교로 돌아온 사람은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미국 보스톤 소아병원과 베스이스라엘병원에서 해부병리 및 신경병리 전문의 과정을 마친 지 교수는 미국 하버드의대 신경병리학 전임강사라는 보장된 직업을 뿌리치고 귀국 길에 올랐다.

1960년부터 정년퇴임에 이르기까지 지 교수는 1,200여편의 학술논문과 22편의 저서, 12편의 단행본을 단독 및 공동 집필하는 등 불모지와 다름없는 신경병리학과 소아병리학을 체계화하는데 앞장섰으며, 후학 교육에도 열성을 다함으로써 학자로서 큰 영예인 대한민국 학술원상과 유한의학상, 지석영 의학상 등을 수상하기 했다.

"40년 병리학자로서의 외길 인생에서 유일한 외도라 할 수 있는 대한의학회 활동에 참여하여 한국 의학계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전종휘,이문호 선생님께도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1987년 대한의학회 간행이사 겸 'Journal of Korean Medical Science' 편집인을 맡게 되면서 의학회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지 교수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의학회장을 맡아 의학회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맡아 왔다. 이 기간 동안 지 교수는 우리말 의학용어의 제정 및 통일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 의학용어집, 국제질병분류집 등을 발간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요즘 같이 국제화시기에 우리말 용어를 쓰자고 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 학문이 주체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국어를 더욱 잘 사용해야 합니다. 나날이 변해 가는 최신의학을 따라잡고 임상이나 교육에 응용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관행적으로 사용해 온 고어를 정리하고, 새로운 용어를 개발해 정착시켜 나가야 합니다."

"오로지 남의 것만을 베껴다 쓰는 그런 학문이어서는 종속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지적한 지 교수는 "우리말은 학문을 보급하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우리말을 쓰지 않으면 속국이 될 수밖에 없다"며 "우리 의학의 주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우리말 의학용어를 다듬어 널리 활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들어 기초의학이 외면당하고 있는 현상과 관련해 지 교수는 "의학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기초와 임상의 조화가 필수적임에도 해방 후 의학 발전이 임상의학에 편중돼 있다"며 기초분야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과 투자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지 교수는 이와 함께 "기초의학자들도 학문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 기초의학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전공 분야에 매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의 교육과 대학원 의학교육의 불분명한 경계의 문제 때문에 박사학위가 학문의 성취보다는 사회활동에 필요한 부속물로 취급받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대해서도 지 교수는 일침을 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결국 생명과학 분야에서 의과학이 중심역할을 하지 못한 채 자연과학계열에 밀리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 교수는 분석했다.

지 교수는 "최근에 부쩍 한국의 젊은 후배들이 외국 학회에서 젊은 의학자상을 탔다는 소식이 늘고 있다"며 "현대의학을 모방하던 전환기에 들어와 잘 마무리를 한 것 같아 선배로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정년 이후의 계획과 관련, "우리말 의학용어를 가다듬고 널리 활용토록 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로 방향을 정했다"고 털어놨다. 지 교수는 최근 의학용어 제 4집에 수록된 용어를 알기 쉽게 풀이한 의학용어 사전 해설집을 집필하는데 매달려 있다. 올해 말 초판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년을 맞기까지 한국 병리의 사명감을 불어 넣어주고 따뜻하게 이끌어 주신 선생님들과 선후배와 동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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